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내가 그동안 이 세상에 한 일이 있다면

소낙비같이 허둥대며 뛰어다닌 일

그리하여 세상의 바짓가랑이에 흙탕물 튀게 한 일

씨발, 세상의 입에서 욕 튀어나오게 한 일

쓰레기 봉투로도 써먹지 못하고

물 한 동이 퍼 담을 수 없는 몸, 그 무게 불린 일


병산서원 만대루 마룻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와이셔츠 단추 다섯 개를 풀자.

곧바로 반성된다.


때때로 울컥, 가슴을 치미는 것 때문에

흐르는 강물 위에 돌을 던지는 시절은 갔다.


시절은 갔다, 라고 쓸 때

그때가 바야흐로 마흔 살이다.

바람이 겨드랑이 털을 가지고 놀게 내버려두고

꾸역꾸역 나한테 명함 건넨 자들의 이름을 모두

삭제하고 싶다.


나에게는

나에게는 이제 외로운 일 좀 있어도 좋겠다.


-안도현

-이철성 [식탁 위의 얼굴들]中


여기 이 벤치에 앉아

겨울 냄새를 맡고 있는 너와 나는

순간 스친 이 냄새에

말을 잃고 깊이 넓어져만 가는 너와 나는

너의 손을 잡지 못하는 나와

내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오는 너는

바람처럼 스산하고

공기처럼 맑아

떨어지며 정지하여

영원히 정지해버린 너는

그림처럼 아름답고

기억처럼 참담하여

내가 너의 아버지이기를 바라고

네가 나의 어머니이기를 바라는 너는

여기 추운 나무들이 서 있는 벤치에 앉아

희망한다.

한 아이가 다른 한 아이의 친구가 되지 말기를

한 여자가 한 남자의 애인이 되지 말기를

그래서

맑은 하늘과 비어 있는 거리

멈춰 선 버스와 흘러가는 시간 사이로

너의 두 눈은 그림처럼 아름다워

겨울 냄새를 풍기고

겨울의 하늘 속으로 멀어져

내가 빠져든 우물,

거울이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속 가능한' 육체와 영혼의 결합은 없다. 공간을 뛰어넘는 사랑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저 난폭한 시간 앞에서 막막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

다만 구체적인 것은 현존하는 두 사람의 육체일 뿐.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는 사랑을 갈망할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두 존재의 결합이라는 연애시의 욕망은, 사실은 그 어긋남에 대한 암묵적인 승인을 전제한다.

그러니 모든 연애시는 '사랑은 가능하지 않다' 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으로써 연애의 주체는 사랑이라는 상처 속에서 실존적 동일성을 부여받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사랑을 방해하는 제도적 현실에 대한 경멸조차도,

그 사랑의 근원적인 불가능성을 은폐하는 알리바이일지도 모른다.
상처의 뼈아픈 깊이를 통해서, 연애에 처한 자는 주체성을 얻는다.
소통의 지속성이 아니라 부재의 지속성이, 사랑의 벗어날 수 없는 중독성을 보장한다.

그러니까 그 모든 부재와 상실과 환멸이 역설적으로

사랑을 증거한다.


-이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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