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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2일에는 잠깐 찰츠브룩으로 여행을 다녀왔었다..시험에서 계속 떨어져 마음도 울적했고 저먼 레일패스도 2일이나 남았고... 사실 더 멀리 다녀올 수도 있었지만 굳이 잘츠브룩을 간이유는 바로 말러 9번 교향곡 자필 초고 팍시밀레 버젼때문이였다.작년에 잘츠브룩에 들렸을때 이 악보를 발견했는데 돈이 없어서 사질 못하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 했었다. 하지만 결국은 재산목록에 하나 추가시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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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번 교향곡 자필 초고는 원래 말러 사후 알마 말러가 보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알반 베르크가 알마에게 자신의 오페라 보체크 총보를 선물로 주자 그에 대한 답례로 이 악보를 베르크에게 넘겨 주게 된다. 이것을 팍시밀레 버젼으로 출판하기 까지 에르빈 라츠는 알마 말러,말러의 딸 안나 말러의 동의를 얻었어야 했고 이 악보의 최종 소장자인 헬레네 베르크 여사는 가장 큰 도움과 협조를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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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초고에서 아쉽게도 4악장만은 누락이 되어 있는데 이미 알마가 알반 베르크에게 이 악보를 줄때부터 4악장은 소실된 상태였다고  한다.
최종버전에 비했을때 1악장은 그대로의 모습을 거의 간직하고 있고 2악장 3악장은 개정이 많이 되어 있다.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미친듯이 써내려간 악보

그는 그 무엇도 아닌 죽음에 쫓기고 있었다.....

군데군데 비어있는 파트보들 아마 그것은 말러가 무언가 더 덧붙여 넣기 위한 자리일 것이다.  

말러는 이 곡을 완성시키고 직접 초연시키지 못한 체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그는 결코 이곡을 들어볼 기회를 가지지 못한 것이다

만약 그가 이 곡을 직접 들었다면 더 많은 오케스트레이션의 변경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모든 교향곡이 그러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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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 볼... 독일에서 이 인사는 두번다시 보지 못할 사람에게 하는 인사다..
말러의 애제자 브루노 발터는 이 곡을 초연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는데 아마 이곡에 들어있는 세상에 대한 말러의 마지막 유언....
선율 하나하나에 녹아있는 삶에 대한 애착 애증을
그리고 초연히 모든것을 포기해버리는 스승의 모습을 떠올리고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이 교향곡에서 음악은 새로이 진화했다 1악장의 그 단순한 호른의 선율이 엄청나게 변화하고 발전해나가며 결국 모든 형식을 녹여버리고 만다... 아도르노가 말했던가? 이 교향곡의 1악장은 Liquidation 이라고...

삶의 대한 진지한 생각이 필요할때....그의 교향곡 9번에 도전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움이 무엇인지 진정 삶에 대한 사랑이란 어떤것이지 알고 싶을때에도 그의 교향곡 9번에 도전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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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에 대해 쓸 것이 너무 많아서 펜을 들 수가 없다. 1년반 전의 일 이후 내 삶은 끝없이 이어지는 경험들로 넘치고 있어서 나는 그 내용을 말로 설명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렇게 끔찍한 위기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내가 보는 모든 사물은 새로운 빛 속에 있고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생생히 살아 있음을 느낀다. 파우스트의 마지막 장면처럼 내가 갑자기 새로운 육신을 갖게 된다고 해도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삶에 목말라 있으며 ‘존재하는 습관’이 그 어느 때보다도 달콤하게 느껴진다. 삶의 광폭한 소용돌이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 자기 자신에 대해, 그리고 우리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존재들에 대해 단 한 순간이라도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지만 나는 이 글 역시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있다. 왜냐하면 바로 다음 순간, 가령 내가 이 방을 나가는 그 순간에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어질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서 생각하는 그 무엇의 정체는 무엇인가? 우리 안에서 행동하는 그 무엇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신기해라, 내가 음악을 들을 때, 심지어 지휘할 때, 나는 이 모든 물음에 대한 답을 완벽하게, 명료하게, 확실하게 들을 수 있다. 아니, 나는 이러한 물음들이 애초부터 없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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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러의 교향곡 6번을 처음 지휘한 것은 1975년이었고, 그 이후로 이 곡을 말러 교향곡 중 가장 자주 지휘해왔다. 이 곡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곡에 담겨 있는 삶과 죽음에 대한 시각에 크게 공감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곡은 희망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심원하면서도 본능적인 투쟁에 대한 느낌을 자극한다. 모든 것이 헛될 뿐이라는 감정은 80분간의 처절한 연소(燃燒)에 불을 붙이고, 연주가 끝나면 작품도 나도 모두 탈진상태에 빠지게 된다. -제임스 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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